고추 피망 파프리카는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
대한민국 표준 사전이라 할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고추, 피망, 파프리카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고추01
「명」「1」『식』가짓과의 한해살이풀. 높이는 60~90cm이며, 잎은 둥글고 끝이 뾰족하다. 여름에 흰 꽃이 잎겨드랑이에서 하나씩피고 열매는 장과(漿果)이다. 잎과 열매를 식용한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로 온대, 열대에서 널리 재배된다.≒당초02(唐椒)˙번초(蕃椒). (Capsicum annuum)
피망 (프piment)
「명」『식』「1」가짓과의 한해살이풀. 높이는 60cm 정도이며 가지는 적고 잎은 크다. 7월에 꽃이 피고 열매는 짧은 타원형의장과(漿果)로 꼭대기가 납작하고 세로로 골이 져 있으며 10월에 익는다. 매운맛이 별로 없으며, 풋것은 여러 가지로 조리하여먹고 완전히 익어 붉은 것은 향신료로 사용한다.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서양고추. (Capsicum annuum var.angulosum)
파프리카 (헝paprika)
「명」『식』 고추의 한 품종. 그 꼬투리를 말려 가루로 만들어서 서양 요리의 향신료로 쓰는데, 주로 헝가리에서 쓴다. (Capsicum frutescens)
'고추'야 틀릴 일도, 모를 일도 없을 테지만, 설명만 봐서는 피망과 파프리카는 어떻게 다른지 쉽게 구분이 안 간다. 다행히 뒤에 학명(scientific name)을 적어 놓았다.(파프리카 항목을 보면 고추(Capsicum annuum)의 한 품종이라고 해놓고 학명은 품종이 아니라 다른 종이다. 사소한 문제라 일단 넘어간다.) 그러니까, 국어사전에 따르면, Capsicum annuum은 고추, C. annuum var. angulosum은 피망, C. frutescens는 파프리카라는 말이다.그러니 실물로 보면 되겠다.

▲국어사전에서 '피망'이라고 주장하는 식물. 일본이 개발한 품종이다.

▲국어사전에서 '파프리카'라고 주장하는 식물
사진을 보면, 누구라도 국어 사전의 내용이 뭔가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겠다.
영어 사전을 한 번 찾아보자(일단임의로 sweet pepper는 단고추로, bell pepper는 둥근고추로 번역한다). 먼저 아래에 나오는 사전들에서피망(piment)을 찾으면 항목이 없다. 영어가 아니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웹스터(Marriam-Webster) 온라인판에서 파프리카(paprika)를 찾으면 "갈아놓은 고추라는 뜻의 papar에서 유래한 헝가리어"라고 어원을 밝혀 놓고서 "각종 단고추(sweet pepper)를 말려서 곱게 갈아 만든 순하고 빨간 조미료, 또는 파프리카를 만들기 위한 단고추."라고 나온다.
롱맨 현대 영어 사전(Longman Dictionary of Contemporary English)에는 "육류나 다른 음식에 약간 매운 맛을 첨가하는 데 쓰이는, 단고추 종류로 만든 빨간 가루" 라고 해 놓고, 양념통에 담긴 '고추가루' 사진을 보여준다.
인터넷이 정보의 바다라는 주장을 사실로 만든 위키백과(Wikipedia) 영문판에서 찾아보면 "파프리카는 안 매운 빨간 또는 녹색 둥근고추(bell pepper; Capsicum annuum)를 말려서 갈아만든 향신료이다. 많은 비 영어권 유럽 나라에서는, 파프리카라는 단어가 둥근고추(bell pepper) 자체를 가리킨다. 이조미료는 음식에 색깔과 향을 첨가하기 위해 많은 요리에 사용된다."고 나온다.
사전마다 설명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영어에서는 공통적으로 '파프리카'는 '안 매운 고추가루'를 가리킨다.
wikipedia: a spice made from the grinding of dried sweet red or green bell peppers
Longman: a red powder made from a type of sweet pepper
Webster : a usually mild red condiment consisting of the dried finely ground pods of various sweet peppers
그럼, 영어 사전에는 안 나오는 '피망'의 정체는 무엇일까?
piment이라는 철자에서 ment를 앙으로 발음한다면 불어(프랑스어) 발음이다. 대부분 단어에서 다음 단어와 연음(liaison;리에종)이 되지 않으면 피망의 't'처럼 끝 철자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비자음(consonnenasale) m이나 n다음에 오는 an, en, in, on, un이 비모음(voyelle nasale)으로 발음되는 불어에서, -ent가 '앙'이라는 비모음으로 발음하는 현상도 불어의 특징이다.
르 쁘띠 로베르트 불어 사전(Le Petit Robert Dictionnaire)에서 피망(piment)을 찾으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더운 지역 원산으로, 그 열매를 이용하려고 재배하는 초본 재배식물 또는 이 식물의 열매.”라면서 단고추(piment doux)는 poivron을 보라고 표시해 놓았다.
불어판 위키백과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피망(piment) 또는 매운 피망(piment fort)이라는 단어는 가지과의 1년생 식물 몇 종을 통칭할 때 쓰는 명사이다. 이것은 남아메리카 또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유래됐으며, 열매를 식료품이나 향신료 용도로 사용하려고 채소로 재배하는 식물이다. 이말은 이 식물의 열매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단어는 캅시쿰 속(genre capsicum)의 다섯 종을 가리킨다."고 나온다.
Le terme piment ou piment fort (Légume vert ou rouge) (qc) est un nomvernaculaire utilisé pour désigner plusieurs espèces de plantesannuelles de la famille des Solanacées. Elles sont originairesd'Amérique du Sud et d'Amérique centrale, cultivées comme plantepotagères pour leurs fruits aux qualités alimentaires et aromatiques.Le terme désigne aussi le fruit de cette plante. Le mot correspond àcinq espèces du genre capsicum.
이들 사전으로 헤아려 보면 불어에서 '피망(piment)'이란 일반적인 고추 속 식물을 통칭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불어판 위키의 piment항목에서 영어 항목으로 전환하면 chili pepper가 나온다.
따라서, 불어의 piment은 우리말 '고추'를 뜻한다. 그럼 우리가 말하는 '피망'은 불어로 무엇일까? 불어로, 특별히 캡세이신(Capsaicin)이 없어 매운 맛이 안 나는 둥근 모양의 '단고추'는 poivron(프와브롱)이라고 부른다(영어의bell pepper). 색깔별로 초록 프와브롱(poivron vert), 노란 프와브롱(poivron jaune), 빨간 프와브롱(poivron rouge)으로 부른다. (프랑스에서는 이 세개를 하나씩 담아 꾸러미를 만들어 '삼색 푸와브롱(poivron tricouleur)'이라며 팔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피망'으로 부르는 것은 불어로'poivron(프와브롱)'이고, 우리가 고추라고 부르는 것은 불어로 'piment(피망)'이다(이 내용은 위키백과 한국어 항목'단고추'에서도 짤막하게 나온다). 굳이 위에서 늘어놓은 장황한 설명도 필요 없이, 당장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poivron'과 'piment'을 넣어 나오는 결과만 봐도 확실히 알게 된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프랑스의 poivron이 한국에 와서 piment이 되었을까?
영문판 위키백과의 우리가 ‘피망’이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되는 bell pepper 항목을 보면 재미있는 설명이 나온다.
프랑스에서는 (후추 또는 고추를 의미하는) 프와브르와 같은 어원으로 이것을 "프와브롱"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ピーマン('피만', 불어에서 유래)이라는 단어는 녹색 bell pepper만을 가리키며, 반면 パプリカ("파프리카",paprika에서 유래)는 다른 색깔의 bell pepper를 가리킨다.
In France it is called "poivron", with the same root as "poivre"(meaning "black pepper", or "piment." In Japan, the word ピーマン ("pîman,"from the French) refers only to green bell peppers, whereas パプリカ("papurika," from paprika) refers to bell peppers of other colors.
이를 보면 한국 사람들이 쓰는 용법과 똑같다. 위키백과의 내용이 정확하다고 가정 한다면, 녹색 bell pepper를'피망'이라고 부르고, 그 외 다른색 bell pepper를 '파프리카'라고 부르는 엉터리 외래어는 일본에서 유래되었다고짐작된다.
이렇게 말이 꼬이다 보니, 일본어 위키백과 ピーマン('피만')에서 불어 항목으로 전환하면, piment이 아니라, poivron(프와브롱)이 나온다(물론 영어로 전환하면 bell pepper가 나온다). 가지각색의 단고추가 나오는 "パプリカ(파프리카)"에서 불어 항목으로 전환해도 poivron이 나온다(마찬가지로 영어로 전환해도 bell pepper가 나온다). 불어에서 유래한 '피만(ピーマン)'이 잘못된 사용임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걸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한국도 일종의 '코랑세(corançais=coréen(우리말)+français(불어))'를 쓰는 꼴이다.
우리말로 된 네이버의 두산동아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가관이다. 피망은 없고 파프리카를 찾아보면 "유럽에서는 모든 고추를 파프리카라고 부른다."는 말이 안 되는 설명을 실어놓았다. 유럽은 50여개 국에, 7억이 넘는 인구에다 온갖 민족이 섞여 있다. 인도-유럽어족이 대부분이라 해도, 슬라브어 계통,게르만어 계통, 라틴어 계통으로 갈라져 서로 말이 안 통하는 데 ‘모든’이나 ‘일부’같은 양화 개념도 없이 그냥 '유럽'이라니,이건 논리에 맞지 않다.
로베르트 불어사전에서 paprika는 "1922년. 헝가리어 유래. 특별히 헝가리음식에 사용하는 안 매운 고추(piment doux)의 가루"라고 짧게 나온다. 불어 위키백과도 영어의 paprika와 설명이매우 유사하다. 대부분의 유럽에서 ‘모든 고추’를 paprika라고 부르겠지만, 적어도 영국과 프랑스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그 뒤에 나오는 설명도 횡설수설이다. 네이트에 탑재된 한국브리테니카 백과사전은 "고추의 열매로 만든 향료"라며 마치 영국 브리테니커 항목을 번역한 듯한 설명이 나오다가, 뒤에 가면 고추의 한 품종이라며 오락가락한다.
우리가 ‘피망’ 또는 ‘파프리카’라고 부르는 둥근 모양의 고추는 영어로 bell pepper이다. 모양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불어로 piment(피망)이 아니라 poivron(프와브롱)이다.
우리말 고추속(屬) 식물과 그 과실을 뜻하며, 매운 맛이 연상되는 ‘고추’에 해당하는 영어는 ‘chili pepper'이고,불어로는 piment(피망)이다. 다른 많은 유럽 국가에서는 ’paprika‘라고 부른다. 또는 영어권이든 아니든 간에 많은 언어권에서 캡시쿱(Capsicum)이라는 속명(屬名)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우리말로 하면 ’고추류‘가 되겠다.
영어에서 sweet pepper와 hot pepper는 고추의 맛을 기준으로 나눴다. ‘단고추’라는 말도 영어의 sweetpepper를 번역한 말이라고 추측된다. 이 sweet pepper의 불어는 piment doux이다. (이 단고추는 원어민의일상에서 영어의 'bell pepper', 불어의 poivron과 같은 말로 쓰인다.) 다양한 변종과 품종의 고추를 각 언어별로어떻게 부르는 지를 알려면 아래 사이트를 방문해 보면 된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불러야 하나?
표준국어 대사전도 고쳐야 한다. 일단 학명부터 고쳐 놓아야 한다. 사전에 오류가 없을 리가 없겠지만,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불합리한 언어 습관이 있다면, 억지로라도 유도해야 한다. '자장면'처럼 말이다.
외래어 수용을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수용할 말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수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경우에 따라서 잘못쓰이는 '콩글리쉬'도 별 문제가 없다면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처럼 합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고, 사물과 대응이 안 되는말인 경우에는 혼란이 생긴다.
같은 Capsicum annuum의 한 재배종(cultivar)에서 생산된 똑같은 것인데, 덜 익으면 일반적 고추를 뜻하는 잘못된 불어인 ‘피망’이었다가, 다익어서 빨갛거나 카로티노이드가 좀 더 함유되어 노랗다고 해서 역시 일반적 고추를 뜻하는 헝가리어 ‘파프리카’로 변신해 버리는 언어 습관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여기서 열심히 '피망'과 '파프리카'를 골라 내야 한다.
'피망'은 어짜피 잘못된 불어이니까 버리는 편이 좋겠다. 다른 언어권에서 쓰는 파프리카라는 말도 그냥 '고추'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말 고추 대신 파프리카를 쓸 이유도 없다. 대안으로 단고추라고 하든, 둥근고추라고 하든, 공고추라고 하든, 착색단고추(착색(着色)한 적 없다)라고 하든, 아무튼 사전 편찬자들이 열심히 연구해 볼 일이다.
언어도 과학과 합리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